초휘(初諱) :제수(悌守) 고려 충숙왕 10년 계해(1323)년에 문과에 올라 벼슬이 판전리사사 겸 대사헌 문화시중평장사 삼중대광 봉(封) 옥천부원군 배위(配位) : 정경부인(貞敬夫人) 단양우씨 父 좌대언 우사(右思) 보칭(輔稱) 묘 : 강릉 우계 송악산 동록에 연봉으로 연봉으로 있다고 대동보에 기록되어 있으나 지금은 실전(失傳)이다.
◎ 파계(派系) 옥천 부원군은 4세 휘(諱) 홍준과 휘(諱) 공용(公用) 형제분으로서 작은집인 공용의 손자이니 우리 문중의 맏집은 종파 또는 영남파라하고 작은집은 옥천부원군 또는 영동파라 하여 크게 둘로 나누어 부를 때 파명이 옥천부원군파라 이름하고 파조가 옥천부원군 휘(諱) 녹후(祿厚)공이시다.
= 관직해설 =
* 판전관리사사 - 전리사(典理司)는 고려때 상서이부의 뒷 이름. 충렬왕 원년(1275)에 이부(吏部)에 상서예부를 합쳐 이름하였는데 그 뒤에도 여러번 개편을 되풀이 했으며 상서육부를 말하고 판사(判事)는 상서육부의 장관으로 즉 판전관리사사는 전리사의 판사를 말하고 종1품에서 3품까지였으나 여기서는 1품인 장관이다. * 대사헌 - 고려 사헌부의으뜸벼슬. 충렬왕34년(1308)에 감찰대부를 고쳐 이 이름으로 하고 정2품으로 올렸다가 충선왕 3년(1311)에 다시 정3품으로 내림. * 문화시중 - 고려때 모든 정사를 도맡아 보살피던 대신으로 정1품의 벼슬인데 충렬왕 원년(1275)에는 첨의중찬이라 고치어 좌우에 각각 한사람씩 두었음. 후에 좌우정승 시중 수시중 등으로 이름을 여러번 고침. * 평장사 - 내사시랑평장사 문화시랑평장사 중사시랑평장사 중서평장사 문화평장사 평장정사 등이있었다. * 삼중대광 - 고려때 문관의 한 품계. 충렬왕 34년(1308)에 정1품으로 정하고 공민앙 5년(1356)에 폐했다가 동1년에 다시 정1품(하)로 정하고 동18년에 또 정1품(상)으로 고침. 고려때 구품향직의 으뜸인 첫째등급. * 봉군 - 임금의 적자를 대군으로 후궁왕자 국구 또는 2품이상의 종친 훈신등을 군으로 봉하던일 * 정경부인 - 조선왕조때 정,종1품의 문무관의 아내의 봉작으로 정부인의 윗품계. * 우대인 - 고려 밀직사의 한 벼슬. 정3품 우승선의 후신으로 충렬왕원년(1275)에 좌승지로 고쳤다가 충선왕 2년(1310)에 이 이름으로 고침.
지금의 대관령 강릉 옛장해 임영이요 남으로 있는 옛 고려조 우계현이다, 오직 이곳은 우계이씨의 발상 유허지시다. 씨는 경주에서 갈라지셨다. 시조 휘(諱) 양식(陽植)공은 고려 인종17년 기미(1139년)년 문과에 급제하고 중서사인을 거쳐서 좌복야에 오르시었다. 이어 2세 휘(諱) 순우(純祐)공은 고려 의종 17년 계미(1163년)년 문과에 장원 급제하시고 을사년에 공역승겸, 직한림원을 거쳐 중서사인 은청광록대부, 추밀원사 예부상서, 대장군, 태자빈객, 지제고, 보문각대제학에 오르시고 금성군의 호를 특사받으셨다.
이어 3세 휘(諱) 적(迪)공은 호장을 지내시며 4세 장사 휘(諱) 홍준공은 중윤호장을 지내시고 5세 휘(諱) 구(球)공은 고려 충렬왕 8년(1283년) 중국눤나라 세조지원 2년 임오 원나라에 들어가시어 18세 어린나이에 진사급제하시고 귀국하시어 예빈경에 오르시었다. 3세 휘 (諱)적(迪)공의 차자 공용공은 향공진사를 지내시고 이어 4세 휘(諱) 감공은 고려 충렬왕 19년 문과에 급제하시어 좌사의 동지사에 오르시었다. 이어 6세 휘(諱) 녹후공은 고려 충숙왕 10년 계해 서기1323년 문과에 급제 하시고 판전전리사사겸 대사헌 문화시중 펑장사 삼중대광(영의정)에 오르시며 옥천부원군(玉川府院君)에 봉하시게 되었다.
배위는 정경부인 단양우씨요. 묘역이 우계 송악산 옰諮?연봉이라고하나 불명이다. 공의 장자 휘 흥원공은 고려 공민왕5년 서기 1356년 문과에 급제하시고 도평의사사사, 진형관직제학, 오부상서에 오르시고 손자 휘 인공은 충무위 부호군, 휘 유공은 진사, 휘 규공은 판서 휘 동대공은 충무위부호군 휘 온공은 조선조 원종공신 중직대부사복경에 이르시다.
휘(諱) 인에 이어 증손 휘(諱) 지공은 좌찬성에 오르시며 계종 찬성공파이시다. 휘(諱) 유공에 이어 현손 휘(諱) 양달공은 정조 호장에 이르시고 계종 참판공파이시다. 8세 휘(諱) 동대에 이어 9세 종만공은 증 통정대부이시며 계종 충위공파이시다.
옥천부원군(玉泉府院君)공의 청렴하신 절조와 문장의 품위가 조야에 떨치시니 조정의 문무백관과 유림과의 교분이 연연하시어 여조일대의 명문거족으로 칭송받았으나 이조말엽에 이르러서 나라의 기강이 해이해지고 나라에 법도가 문란하여짐에 국가의 중진 신하의 가벌도 스스로 조정에서 물러나 경향각지로 혹은 숨고 혹은 피하게 되니 선조의 계보사적이 소멸한지 800여년이라 상전이 벽해로 수없이 변하고 운연이 산만하여 산천은 점점 황페하여 가고 시조 복야공이하 옥천부원군에 이르시는 육대에 긍하시어 여조대대 궁신의 대열이시요 현달히신 선조님의 찬연하신 사적이 인멸되고 전하여지는 길이 없으니 이 어찌 천추의 유한이 아니며 대방가의 도리라 하겠는가.
해를 거듭하여 탄식하고 금석에 상고할 길이없어서 백세지하로 쇠퇴 변천함을 탄식하며 뒤를 계승하는 후손으로서 보본지도가 미흡하니 어찌 통흡지 않으리요. 항차 예의지 니라 조상에 대한 행례인즉 서리 이슬내리는 시절과 낙엽지는 계절에 어찌 정성을 다바치지 않을손가 큰 냇물은 가믐이 없고 큰 나무는 잎이 무성하고 원천이 깊은 물이 장류함은 또한 사물에 이치로다. 다행하게도 우계에 남은 운이 다시금 밝게 빛나시어 대를 계승하는 23대손 성교가 자진 성금 수천만원으로 전국 각처에 화수회를 결성 추진하고 먼저 시조 복야공 경모비를 수립하고 계속하여 옥천부원군의 파계종과 협의하여 디시금 옥천부원군 신도비를 새겨 세우고 위로 선조님의 근면하심을 귀감으로 삼으며 아래로 후손의 도리로서 보본의 정성을 다하니 어찌 위대치 않으며 아름답지 않으리요 지금까지 생소하던 일가가 가까워지며 어제 노상에서 낯선 사람이 오늘의 종족이로다. 신도비 옥석수립에 즈음하여 나에게 서문을 위탁하니 나의 짧은글이 의불문으로 감히 망언이나 되지 않을까 염려하면서 이어 영지 하나이다. 부원군에 큰뜻을 추모하오니 그 은혜 높으시고 길도다. 봉분은 어디에 계시는데 잡초만 우거진 황성이로다 옥석으로 각명하오니 영령께서 오르고 내리신가 하나이다. 신도비를 모시게 되니 옛터가 새로와진가 하나이다. 정성바쳐 봉하는 제향 미흡하고 또 미흡하나이다. 삼가 송학산을 우러러 보니 갈수록 더욱 프르고 푸르도다. 영원한 세대 상향하옵소서.